노화와 죽음
노화와 죽음은 반복된 출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만약, 출생이 없다면, 노화와 죽음이라는 현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항은 인과관계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노화와 죽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생, 노화, 사망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의 반복된 발생, 부패, 소멸 또한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체적인 측면과 더불어 정신적인 측면도 인과관계의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적인 출생, 노화, 죽음을 통해, 스스로의 정신 상태를 분석하고, 그것들을 통해 이러한 출생, 노화, 죽음의 과정들이 우주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것에 가장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출생의 관건은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인과관계를 통해 경험할 것이 없다면, 세상의 세 가지 큰 범주인 관능적인 영역, 형태의 영역, 형태가 없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육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정신상태의 존재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의 정신은 관능적인 것에 늘 관심이 있고, 그러한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면, 그에 걸맞는 관능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생명체로 태어날 것이며, 정신 또한 그에 부합하여 생각이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것의 출발은 갈망이라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관능적인 것을 갈망하든, 미래의 것을 갈망하든 간에 갈망하는 감정 자체로 인해, 다시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거듭되게 된다. 갈망은 감정이다. 만약,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즐거움이나 고통의 지속적인 경험에 목말라하지 않을 것이다. 유쾌하지 못한 일을 멈추기 위해 즐거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행위는 갈망이라는 감정을 낳게 된다.
갈망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은 감정의 일환이며, 감정은 느낌을 통해 발생한다. 느낌은 다시 접촉으로 인해 생기며, 만약 접촉하지 않는다면 기쁨이나, 고통도 없게 된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알 길이 없어서이다. 접촉은 각자가 어떻게 육감적으로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어떤 사물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이를 생각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육감은 감정, 지각, 주의, 접촉, 의도 등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영역은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이 관여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특정화된 느낌을 규정짓기 때문이다. 느낌은 접촉을 하는 사이에 발생한다. 육체적인 접촉이 감정적인 느낌을 발생함으로써,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갈망이라는 형태의 조건을 낳게 되고, 만약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싫다는 감정을 부여함으로써, 회피의 조건을 낳게 된다. 이렇게 갈망은 어떤 마음의 상태를 형성함으로써,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이라는 감정이 발생하게끔 조건화되게 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고통의 발생은 조건화된 마음의 상태, 즉 갈망이 원인이며, 고통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래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는 조건적인 틀을 찾아내어 그것을 내려놓는 수행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싯다르타의 주장이다. 만약 이러한 지식이 없으면,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결국 괴로움이나 고통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지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무지가 멈추면 고통의 형성도 멈추게 된다. 이는 다시 노화와 죽음이라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며, 모든 인과관계가 풀리면서 중단되고, 마침내 단순한 존재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의존적 공생 과정, 즉 인과관계의 현상들이 많아 무한정 반복되는 고통을 낳게 된다. 예를 들어, 출생, 노화, 죽음의 고통은 무지의 상태로 있는 한, 고통이라는 감정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 미술에서 왜 윤회를 생명의 바퀴로 표현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 볼 수 있다. 노화의 슬픔은 단순히 인과적인 고리과 죽음과 연결된 무지를 상징한다. 인과관계 이론으로서, 이러한 공식은 선형적이면서도 동기적이라는 점에서 현대의 혼돈 이론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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