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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관련 정보

부처의 각성: 사회적 배경을 통해 본 깨달음의 시작

by jiji1 2022. 9. 16.

시대적 배경

초기 불교는 부처의 각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부처가 깨우친 진리인 불교는 조건을 초월한다.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그가 가르침을 표현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사회, 문화적인 요소를 통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처가 각성하기 전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부처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 갠지스 평야에서는 사회적, 지적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절대 군주들은 새로운 도시를 개발하고 있었으며, 증가하는 상인 계급과 재산 소유주의 지원을 받는 통화 경제를 기반으로 한 정치 및 경제 권력의 중심이 당시의 풍토였다. 그들은 전통적인 귀족과 종교적 엘리트들을 대체하고 있었다. 초기 씨족에 기반을 둔 농업 공화국에서 번성했으며, 기존의 엘리트층들은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있었고, 사회의 많은 구성원이 세대교체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세력들은 전통적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새 시대를 꿈꿨다. 이러한 진보파 세력의 구성원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전통적인 종교적 신념과 관습은 실질적으로 베다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베다는 전통은 인도 아리안들의 종교적인 찬양 대상이었고, 그들은 인도 북서쪽을 가로질러 인도 안에 들어왔다. 이러한 베다전통은 세습에 구전되었으며, 철학적 사색에 종사한 브라만이라고 불리는 아리안 사제 계급 그리고 종종 동물 희생을 수반하는 권한 부여 의식을 실시하곤 했다. 베다전통을 고수하는 이들은 인도 땅에서 발전을 지속해갔고, 신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며, 종교적인 의식을 진행해 갔다.

 

브라만

브라흐마로부터 의인화된 신은 마치 살아있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신들이 없으면, 누가 우주를 창조하고, 이 세계를 유지시킬 것인가. 이러한 베다의 전통 의식에 따라, 그들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으며,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계급, 즉 이러한 신들을 믿고, 숭배하는 사람들을 브라만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브라만들은 신의 바로 아랫단계인 신의 후손으로 여겼으며, 다른 나머지 계급의 지배권을 갖는 보다 높은 존재로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브라만주의라고 불렀으며, 베다교의 단계를 정의한 하나의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6세기에 이러한 베다식 사고방식에 반항하는 반베다 운동이 일면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정치질서가 혼란스러워졌고, 뒤이어 사회적으로 베다교에 대한 거부가 심해지게 되었다. 베다 전통을 고수하며, 기존의 엘리트들이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새로운 종교와 철학적 집단이 나타나서, 베다교 전통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베다교는 브라만교라고도 불리는데, 이러한 브라만교의 기본적인 주장과 그들이 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들을 더 이상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지 않게 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지도자들은 비신앙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몇 브라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싯다르타

부처의 이름은 싯다르타였다. 그는 당시 숲의 마을이나 마을 밖을 돌아다니며, 방랑자로 살았다. 싯다르타를 추종하던 세력들은 유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극도의 금욕주의, 회의주의, 숙명론, 쾌락주의 등 다양한 가르침을 주창했던 거장들을 중심으로 많은 집단들이 있었지만, 싯다르타는 그러한 거장들 중 하나로써, 초기 불교를 설립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 시대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삶과 궁극적인 행복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했던 가장 큰 주요 쟁점은 죽음과 인과관계였다. 우선, 죽음에 대해서 그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각 개인의 삶은 수 없이 많은 삶을 거듭하면서 확장된다고 가정했으며, 거듭된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반복으로 삶이 계속된다고 여겼다. 비록 초기 베다 사상은 부활에 대한 생각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싯다르타는 특히 이 부분을 사실이라고 여겼다. 행복은 오직 끝없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때문에 어떤 집단, 예를 들어 로카야타라고 불리는 쾌락주의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정체성의 존재도 부정하고 행복은 바로 지금 있으며, 오직 감각의 쾌락에 탐닉함으로써 궁극적인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인과관계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도 각 집단마다 의견을 달리하였다. 베다 사상가들과 일부 스라마 학파들은 인간의 행동이 한 사람의 행복을 이 생애와 미래의 삶 모두에 영향을 끼치는 인과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일부 베다 학파들은 모든 행동이 선형적이고 결정론적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과관계의 법칙은 반복된 주기성을 보이며, 모든 행동에 대한 결합으로 설명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비폭력과 무활동의 삶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등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릇된 신념 때문에, 많은 집단들은 인과관계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고 순수하게 물리적인 진화 과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두 문제에 대해 싯다르타는 궁극적인 행복 추구의 지적 배경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싯다르타의 각성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의 사상은 이후 수세기 동안 인도 북부와 그 외 많은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